이름, 나이, 직업, 지역, 그리고 ‘MBTI가 어떻게 되세요?’가 통성명 풍습으로 굳어진 지금. 어렸을 적부터 심리 테스트나 혈액형에 관한 고찰을 좋아하던 나는 자칭 타칭 MBTI 척척박사다.
신빙성 없는 연구자로서 주변 표본들을 연구한 결과 계획적이지 못(또는 안)한 P 유형 중에서도 유독 꾸준한 것에 젬병인 MBTI는 단연코 xNFP 유형이다.
MBTI 이론에 따르면 이들 중엔 쉽게 흥미를 갖고 쉽게 흥미를 잃는 변덕쟁이에 루틴보다는 익사이팅을 추구하는 하루살이형이 많다.
더불어 걷잡을 수 없이 뻗어가는 생각은 맡겨진 일에 집중하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늘 번갯불에 콩 볶기가 특기인 우리 같은 사람들. 그럼에도 모두와 어울려 살아가려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들을 대표하여 인생 노하우를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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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에서 마지막 7km를 남긴 지점을 ‘마의 구간’이라고 한다. 마의 구간은 첫 35km를 꾸준히 달려온 마라토너에게 가장 피로도가 높아지는 구간이다. 이 구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게 계획적으로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반면 나 같은 사람은 이 마의 구간을 전력 질주로 달리는 사람이다. 계획적인 페이스 조절보다 막판 순간 집중력의 힘을 믿는다. 마라톤이 폐장하기 전까지 결승선을 통과하면 되는 거니까.
대학생 시절, 소멸법이라는 목판화 기법을 배운 적이 있다. 한 번에 끝나는 작업이 아닌 여러 번에 걸쳐 넉넉히 건조 시간을 확보하며 계획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모두가 과제 제출일에 맞춰 계획적으로 작업하고 있을 때, 나는 딴짓 중이었고…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구간’에 도달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이랬던가. 묘안을 생각해 낸 나는 비교적 건조가 빠른 수성 잉크를 사용해 물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혼자 수성 잉크를 사용했던 점을 좋게 봐주신 교수님 덕분에 의도치 않게 좋은 점수를 받은 건 덤이다.
이제서야 고백하지만 사실 저 꼼수 부린 거였어요,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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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많이 하지 말자’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무적의 주문들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라도 끝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오죽하면 대중적인 밈이 되었겠는가. 2024년 첫 인스타그램 포스팅의 마지막 사진은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로 장식했다. 오은영 선생님의 단호한 눈빛을 부적 삼아 지난 1년 동안 미루고 미루었던 똥을 치우고 해야 할 일을 하자는 나의 포부를 담았다. 간간이 그녀의 눈빛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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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우리 같은 사람은 회피할 수 있을 만큼 회피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타임어택을 줄 인물이 필요하다!
카운슬러의 은은하고 나이스한 압박은 은연중에 내게 책임감을 심어준다.
그러면 괴로움을 잠시 뒤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데에도 많은 회피와 도피가 있었으나, 친절한 카운슬러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흥미로운 주제… 그리고 그 주제에 잡아먹힌 사람처럼 괴로웠지만 절 믿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글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그건 느낌이 아닌 팩트입니다. 왜냐면 곧 카운슬러의 독촉이 올 시간이라서 뭐라도 보내줘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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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노하우들로 연명하다가도, 어쩔 수 없이 늦어버리는 순간도 많다. 깔끔하게 포기할 줄 아는 것도 미덕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져버린 책임에 대한 빵빵한 사과는 늘 마음 한편에 준비해 둔다.
중학생 시절, 교내 사생 대회에 참가한 학생 중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학생들이 소집돼 단체로 반성문을 써야 했던 쇼킹한 기억이 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반년도 안 된 아이들이 반발심 담긴 꼬질꼬질한 문장을 쓸 동안 나는 나름대로 진심 어린 반성을 담은 글을 제출했다. 그 마음이 전해져 선생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린걸까. 그는 영문 모를 기준으로 내 글을 우수 반성문으로 선정했고 나는 소집된 서른 몇명의 학생들 앞에서 글을 낭독해야만 했다. 웃픈 사연이지만 아마 이때부터 프로 반성러의 자질을 보였던 것 같다.
왜 늦었는가
개선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앞으로의 계획
진심 어린 뉘우침
이 4개를 반드시 포함한다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어버린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받을 지도 모른다. 손바닥으로도 하늘이 아주 조금은 가려진다. (아마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계획을 잘 짜고 그것들을 완벽히 이행하는 자들을 동경하며… 오늘도 시간이 임박했기에 줄이겠다. 모두의 걸음걸이가 다르듯 각자의 걷는 방법이 있는 거니까. 스스로의 대기만성을 믿으며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나의 동지 제우스⚡️ 친구들.
펴낸이의 말
중학생 시절, 기똥찬 반성문을 교실 앞에서 읽는 제우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우정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