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직접 대화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이 편지를 쓴다. 28년 동안 네 이름을 모른 채 함께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삶의 꾸준한 동반자였지. 나는 이제야 우리의 여정을 돌아보고, 너의 존재를 인정하며, 앞으로 함께할 날들에 대해 약속 해보려고 해.
너의 인기척을 느낀 건 언제부터였을까? 초등학교 때가 처음이었지 싶어. 그전까지는 산만한게 당연히 여겨지는 나이였으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숙제는 사실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도 숙제를 끝내는 게 이유없이 무척 어려워서 새벽에 일어나 겨우 끝마치곤 했지. 그 어린 나이에도 나 자신이 답답하다고 느꼈고, 그때부터 임포스터 증후군이 생겼는지도 몰라. 하지만 넌 아무것도 모른 채 밤새 날 뒤척이게 만들었지. 다음 날 아침엔 피곤한 몸으로 등교해 2교시부터 졸곤 했어. 푹 잔 같은 반 친구들에겐 비밀이라도 들킬까 만화책 보다 늦게 잤다고 둘러댔고.
그 후로도 넌 나를 어디든 쫄래쫄래 따라왔지. 도곡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한적한 시골길로도, 고등학교의 나무 복도로도, 심지어 군 복무 중 지냈던 강원도 인제군의 산꼭대기까지.. 너는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했고, 내 일상의 리듬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어.
최근에 입사한 직장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너의 존재를 좀더 또렷히 알게 되었어. 현지화가 덜 된 해외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던져진 탓에, 나는 임기응변과 체계적 변화를 여러 번 요구 받았어. 예측하지 못한 업무를 맡고, 맡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진 적도 허다했지. 촉박한 시간 내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건 너무 어려웠어. 주변 동료의 모습과 비교되기까지 했지.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기획안이나 그래픽이 마지막에 완전히 바뀌는 경험 앞에선 그야말로 뇌가 파괴되는 듯한 기분이었고, 다시 시작할 생각에 막막할 뿐이었어. 하지만 직장은 계속 다녀야만 했기에 때로는 외부를 탓했고, 때로는 내 자신을 탓했어.
40개월간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업무는 왜 여태껏 어려울까? 왜 예측하지 못한 업무가 발생했을 때 남들만큼 빨리 적응하지 못할까? 많은 이들이 직장생활과 병행하는 이직 준비가 나는 왜 이리 오래 걸릴까? 나는 그냥 여기에서 그치는 삶을 살 운명인 걸까? 나름의 답을 찾으려 내면의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게 됐어. 그리고 그 끝에 내 안에 있는 너의 이름이 ADHD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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